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폴란드 침공 (문단 편집) === 폴란드 국내의 문제 === 이러한 숫적, 질적 열세 이외에 또 다른 문제도 있었다. 우선 1919년 폴란드 독립 당시 전체 성인의 1/3이 [[문맹]]자였으며, 이후 폴란드에서 국민 교육이 이루어지면서 문맹률이 낮아지긴 했지만 문맹자가 거의 없는 독일과는 상황이 달랐다. 그래도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폴란드가 의욕적으로 국민 교육에 나서면서 문맹률은 많이 낮아진 상황이었다. 1921년 당시 폴란드 농촌 지역의 문맹률은 38%에 이르렀으나[* 당시 폴란드에서 농민은 전체 국민의 75%를 차지했다.] 1931년에는 27%로 낮아졌고[* 도시 지역까지 감안하면 전국적으로는 23%.] 1937년에는 18%까지 줄어들었다. 사실 당시 폴란드의 교육 문제는 폴란드가 교육에 관심이 없어서라기보다는 폴란드의 [[프리비슬린스키|대부분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러시아 제국]]이 폴란드인들의 교육에 거의 관심이 없었기 때문인 탓이 컸다. 또한 거의 대부분의 인구가 독일계인 [[독일]]과 달리 당시의 폴란드는 다민족 국가였는데, 실제로 1931년 인구 조사에서 폴란드인들은 66%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우크라이나인]](15.3%), [[유대인]](8.6%), [[벨라루스인]](4.3%), [[독일인]](2.6%), 기타 순이었다. 이 중 독일인들은 폴란드 독립 후 상전에서 [[소수민족]]으로 전락한 자신들의 처지에 불만을 가졌고, 폴란드 지주 계급에 대해 원한을 갖고 있던 우크라이나인들 또한 [[전간기]] 동안 동화 정책을 펼친 폴란드 정부에 적대감을 갖고 있었다. 전통적인 적대감 이외에도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잘 개발되어 있으며 폴란드인들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폴란드 서부와, 반대로 소수민족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그래도 폴란드인들이 숫적으로 제2민족을 차지하기는 했다.] 개발이 거의 되어 있지 않던 폴란드 동부간의 경제적 격차 또한 이러한 갈등을 더욱 부추겼다. [[니키타 흐루쇼프]]의 회고록에 따르면, 소련군이 폴란드 동부로 진군하여 독일군의 공격으로 파괴된 정유공장에 이르렀을 때, 우크라이나인 기술자가 흐루쇼프를 반기며 폴란드 놈들 밑에서 나같은 우크라이나인이 기술자가 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건지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라면서 폴란드 욕을 쏟아내었고 옆에서 폴란드인 기술자들은 소련군 고위장교에게 우크라이나인 동료가 우크라이나어로 뭔가 말을 쏟아내는 것을 보고 공포에 질려있었다고 한다. [[유대인]]들은 숫적으로 의미있는 소수민족 중에서 그나마 폴란드 정부에 고분고분한 편이었지만 전간기 폴란드에 점차적으로 퍼지고 있던 [[반유대주의]]는 이들을 완전한 폴란드 국민으로 통합시키는 데 있어 저해 요소로 작용하였다. 전간기 폴란드 지도자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의 사나치아(Sanacja, 청결) 정부는 민족보다 조국에 대한 충성심을 더 중요하게 받아들였기에 유대인들에게 관대했지만[* 1935년 피우수트스키가 지병으로 사망하자 폴란드 유대인들이 그의 죽음을 크나큰 비극으로 받아들였을 정도였다.] 피우수트스키의 반대파이자 사나치아 운동과 함께 폴란드 정치의 양대 축이었던 민족민주주의(Narodowa Demokracja, 통칭 엔데치아·Endecja) 운동은 배타적 민족주의의 속내를 드러내었다. 이후 피우수트스키가 죽자 반유대주의적 경향은 더욱 심해져 갔다. 군대 구성에 있어서도 이러한 민족 간 갈등은 여실히 드러났다. 95만에 이르렀던 폴란드군 병력 중 [[유대인]]은 8~10%[* http://www.yadvashem.org/odot_pdf/Microsoft%20Word%20-%206215.pdf, p.3](또는 약 13만명), [[우크라이나]]인은 11~12%[* Waldemar Rezmer, Stanowisko i udział Ukraińców w niemiecko-polskiej kampanii 1939 roku, w: Polska-Ukraina. Trudne pytania, t. 4, s. 24](또는 약 11만 명)에 이르렀지만 1939년 9월 개전 당시 폴란드군 고위 장성 중에서 소수민족 출신은 극히 드물었다.[* 물론 아주 없는 것은 아니어서 폴란드 제6보병사단장 [[https://en.wikipedia.org/wiki/Bernard_Mond|베르나르트 몬트]](Bernard Stanisław Mond)는 유대계, 피오트르쿠프(Piotrków) 작전집단 지휘관 [[https://en.wikipedia.org/wiki/Wiktor_Thomm%C3%A9e|빅토르 톰메]](Wiktor Thommée)는 [[프랑스]]계였으며, 제16보병사단 부사단장 [[https://en.wikipedia.org/wiki/Alexandre_Chkheidze|알렉산데르 치헤이제]](Aleksander Czcheidze)는 [[조지아 민주 공화국]]이 몰락하며 폴란드로 건너온 [[조지아인]]이었다. 그리고 [[독일계 폴란드인]] 장군들은 폴란드 국경방위군단(KOP; Korpus Ochorny Pogranicza) 사령관 [[https://en.wikipedia.org/wiki/Wilhelm_Orlik-R%C3%BCckemann|빌헬름 오를리크뤼케만]](Wilhelm Orlik-Rückemann)과 폴레시에(Polesie) 독립작전집단 지휘관 [[https://en.wikipedia.org/wiki/Franciszek_Kleeberg|프란치셰크 클레베르크]](Franciszek Kleeberg), 우치 군 사령관 율리우시 룸멜(Juliusz Karol Wilhelm Józef Rómmel), 폴란드 함대 사령관 유제프 운루크(Józef Unrug), 노보그로츠카 기병여단 준장 [[https://ko.wikipedia.org/wiki/브와디스와프_안데르스|브와디스와프 안데르스]](Władysław Albert Anders)가 있었고, 예비역 장교 중에는 [[카를 알브레히트 폰 합스부르크|합스부르크 출신]]도 있었다. 그리고 이 독일계 장군들은 독일이 침략하자 모두 배신하기는커녕 끝까지 폴란드 편에서 독일에 맞서 싸웠다. 다만 후술하듯 룸멜은 나중에 항복을 주도하지만, 당시 상황을 감안하면 참작의 여지가 있다.] 이와 같은 민족 갈등은 이후 [[자유 폴란드군]]을 구성할 때도 재발했는데, 예를 들어 브와디스와프 안데르스[* 상술했듯 안데르스는 혈통상으로는 독일계였고, 결혼은 우크라이나계 여성과 했다. 안데르스는 전후 폴란드가 공산화되자 영국에서 여생을 보냈다.]는 자신의 군대를 순수한 폴란드인으로 구성하기를 원했다.[* 이후 안데르스가 소련과 이란을 거쳐 팔레스타인에서 병력을 재편해서 자유 폴란드군에 들어갈 때, 그를 따라간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에 남았는데 훗날 이스라엘 총리가 된 [[메나헴 베긴]]이 팔레스타인에 남은 유대계 병사 중 한 명이었다.] 이는 [[폴란드 제2공화국]]이 완전한 국민국가로 거듭나는 데 실패했음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마지막으로 당장 병력이 부족하다는 것은 폴란드 정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예비군을 총동원하려고 했지만, 그런 조치는 독일의 침공을 앞당길 수 있다고 서방 연합국들이 반대하는 바람에 개전할 때까지 총동원령이나 예비군 소집을 하지 못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체코슬로바키아와 단치히 자유시 문제를 통해 독일의 영토 확장욕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평화에 대한 실낱같은 희망을 버리지 못한 나머지 이 짓거리를 폴란드 침공이 발발하기 직전인 8월 30일까지 계속했다. 실제로 이날 폴란드군 총사령관 에드바르트 리츠시미그위 원수는 폴란드군의 '전시 동원'을 선포했지만 프랑스 정부가 아직까지 가망이 남아 있다 생각하여 폴란드에게 괜히 독일을 자극하지 말라며 태클을 걸었다. 결국 9월 1일 시점에서 폴란드는 동원 계획의 70% 정도만을 완료한 상태였으며, 상당수의 부대는 아직 대형조차 갖추지 못한 채 전선으로 다급하게 이동하고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